성도야, 울지 마라! 사랑이 있다
이 설교는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18절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과 두려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찬영 목사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 사랑을 아는 것이 심판 날에 대한 담대함을 가져온다고 역설합니다. 또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성경 말씀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당연히 두려움을 느낀다고 지적하며, 두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설교는 성도들이 두려움을 숨기려 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찾으며, 서로 아픔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Summary
인간의 두려움과 불완전함 속에서 신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1. 인간의 두려움과 불완전함의 본질: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심판 날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죽음, 재정, 자식, 실패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두려움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느끼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신앙이 아닌 것:
지식적인 앎이나 철학, 이데올로기만으로는 확고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두려운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척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며 불신앙으로 간주됩니다.
교회에 충성하거나 삼위일체설과 같은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닙니다.
3. 인간의 두려움과 불완전함 속에서 신앙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적인 앎과 믿음: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믿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종교관(인간이 신을 달래야 신이 은혜를 베푼다)과는 정반대되는 획기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심판 날에 대한 담대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그것을 알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담대함은 우리가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며, 심판 날에 그 사랑했던 예수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담대함은 심판이 우리와 관계없다고 기탄 없이 말할 수 있는 영적 담대함을 의미합니다.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믿음은 두려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이걸 느끼는데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져주세요"라고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음: 두려움이 우리를 계속 공격해 올 때, 온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며 사랑으로 채워주시기를 갈구해야 합니다.
삶의 재정립: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기준으로 삶을 재정립할 때 예배와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구원의 근거가 되고, 삶의 근거가 되며, 삶을 평화롭게 인도합니다.
공동체의 역할: 교회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같이 위로해 주고, 같이 아파해 주며, 솔직한 모습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넘치며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두려움과 불완전함 속에서 신앙은 우리가 유한하고 죄인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깊이 깨달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심판 날에 대한 궁극적인 담대함을 주며, 삶의 두려움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그 두려움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평안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